[이 아침에] 4월, 꽃 이야기
4월이다. 10년 전 이맘때, 아내와 둘이서 도보 국토 종단을 했다.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2000리 길을 4월 한 달 동안 걸었다. 한국의 4월은 꽃철이었다. 노랫말처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만발하고 개나리 배꽃 산수유가 차례로 피어나며 튀밥 튀듯 여기저기서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렸다. 산천이 온통 꽃 천지였다. 꽃은 날씨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천천히 피어 올라갔다. 우리가 꽃을 몰고 올라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꽃과 함께, 꽃에 묻혀 걸었다. 새싹이나 꽃이 그냥 피어나는 것 같지만 제각각 순서가 있다. 이곳 우리 동네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은 팝콘이다. 톡톡 피어나는 팝콘 소리로 한동안 골목이 수런거리고 나면 단풍나무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. 비 온 뒤, 우리 집 뒤뜰 무화과나무와 푸르메리아가 잎을 달기 시작했다. 뒷마당 귀퉁이에 서 있는 석류나무가 참새 혓바닥 같은 싹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바람에 나부낄 만큼 자랐다. 햇빛을 받아 팔랑거리는 석류이파리를 보면 호수 위에 일렁이는 윤슬 같다. 감나무 이파리는 싹을 내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. 감 이파리에 참새가 앉아도 보이지 않을 만큼이면 못자리를 시작한다고 했다. 자연과 함께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생각해본다. 순서를 지키며 피어나는 게 나무나 꽃뿐이겠는가. 일찍 피면 빨리 시들고 늦게 오는 꽃은 오래 머물기 마련이다. 세상의 이치다. 꽃철이 따로 있겠는가 꽃 피면 꽃철이지. 오뉴월 캘리포니아 거리에 휘날리는 자카란다 꽃 이파리며 찬 서리 받으며 방실방실 피어나는 들국화는 또 얼마나 싱그러운가. 생각해보면 사람도 꽃이다. 새싹으로 돋아나 세월 따라 뿌리 내리고 가지를 뻗어 꽃을 피워낸다. 어떤 싹은 백 년 거목으로 자라 수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고, 어떤 놈은 비바람에 이기지 못해 가지가 꺾이고 둥치 째 넘어지거나 뿌리가 뽑히기도 한다. 봄이면 봄꽃이 피고 가을엔 가을꽃이 벙그러지듯 사람 꽃도 피어나는 계절이 제각기 다르다. 제철 꽃조차 장소와 기후에 따라 다르게 핀다. 어떤 어머니는 제 자식이 어떤 꽃인지 알지 못한다.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. 그러니 피어날 때를 알 턱이 없다. 옆집 꽃이 망울을 맺으면 내 새끼는 그보다 먼저 활짝 피기를 원한다. 가을꽃더러 봄에 피라고 닦달하니 아이가 견뎌낼 수가 없다. 가만두면 제대로 피어날 보리 모가지를 쑥 뽑아 놓았으니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. 들판에 피어나는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. 제각기 모습으로 제각각 아름다움을 뽑낸다. 저렇듯 주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피고 또 진다. 자연의 섭리다. 사람도 마찬가지다. 천인 천색, 만인 만색이다. 서로의 색깔과 모습을 존중하며 어울려 살아가야하는 한 송이 꽃이다. 4월, 태평양 건너 꽃바람이 불어온다. 섬진강 매화 얘기도 영암 벚꽃 백리길 소식도 건너온다. 내 땅을 내 발로 걸어 올라가던 때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. 정찬열 / 시인이 아침에 이야기 감나무 이파리 뒤뜰 무화과나무 참새 혓바닥